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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뽈뽈/동유럽 2012

[오스트리아]빈(비엔나)-예술의 도시 빈

라온그리메 2012. 8. 31. 23:36

 

 

 

 

 빈에 도착하여 짐을 숙소에 놓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사실 나의 여행일정은 잘츠카머구트에서 끝나 있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보아야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 뭐, 빈에 가면 커피 마셔야지, 슈니첼 좀 먹어봐야지...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고, 지리도 전혀 익혀두지 않은 상태였달까...

 무얼 주로 볼까~하다보니 (사실 빈이라면 오페라나 음악을 들어야겠지만, 여름이라 다 휴가 떠나고 없음)  박물관 , 미술관, 궁전이 머리에 떠올랐다.

 

 박물관이라면 자연사 박물관, 궁중박물관이 있을테고, 미술관이라면 그 유명하다는 클림트의 작품들이 있을테니 그것 정돈 봐줘야 할 것 같고, 아무래도 슈테판 성당 정도도 보긴 해야할 것 같고, 체력만 된다면 필름페스티발도 끌리기는 하고.....

 

 딱히 어디로 가야하겠다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서역의 지하철로 향했다. 눈에 띄는 노선을 타고 가다보니 volks역이 보였다. 그래, 여기 미술사-자연사 박물관이 있다고 했지? 여기로 가자-라고 마음을 먹고 즉흥적으로 역에서 내렸다.... 노선이나 지리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그로 인해 나중에 고생)

 

 

 

프라하, 체스키, 잘츠, 오버트라운... 모두 작은 도시들만 다니다 빈의 대로에 서 보니 머리가 멍~한 게 도무지 방향감각이 생기질 않았다.

햇볕은 뜨겁게 내리 쬐고, 날씨는 덥고 동네는 낯설고..... 게다가 커서 그렇겠지만(특히 도로) 뭔가 굉장히 황량한 느낌....

 

 

생각보다는 쉽게 찾은 박물관. 자연사박물관과 미술사박물관은 나란히 있었다. 시간이 이미 오후를 지난지라 어느쪽을 갈까~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미술사쪽으로 향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때 빈에서는 미술을 보자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세종대왕..쯤 되려나? 마리아테레지아의 동상도 건물처럼 수리중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1](독일어: Maria Theresia 마리아 테레지아[*], 헝가리어: Mária Terézia 마리어 테레지어[*], 체코어: Marie Teresie 마리어 테레시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는 합스부르크 군주국[2]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3]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 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황후의 지위를 얻었다.[4]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5]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7년 전쟁이 종식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선진국화를 위해 여러 가지 내정 개혁을 실행에 옮겨 큰 성과를 거두었다. 명목상의 황제인 남편 프란츠 1세의 치세기간 중 그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에 관여하였다. 이에 각지의 제후국,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이는 노골적으로 불만과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선 그녀는 사병 확충 주장을 물리치고 다른 나라보다 먼저 전국에 초등학교를 신설하여 의무 교육을 확립시켰다. 이에 따라 같은 내용의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배포되어 각 지역마다 각각의 언어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매춘을 금지시키고, 매춘 여성과 포주, 중개인들을 잡아다가 채찍형을 가한 후 노동 교화소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런 점을 높이 사서 프랑스 내에서의 매춘행위를 금지하게 하였다.

마리아테레지아는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여제나 다름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여제시 되고 있었다. 정식으로는 황후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이처럼 다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남편인 황제가 프랑스 국경 주변의 로트링겐 공국 출신이며, 실제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제위는 남편의 소유가 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군소 국가의 독립 체제로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여 실질적으로는 명예 작위이었던 반면, 법적으론 국가가 아니였지만 군주의 권한이 강했던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당주권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란츠는 부군으로서의 이미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제적 이미지(실제로는 황후이며 여왕)로 세간에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어로 쓰인 백과사전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를 여제(신성로마제국의 여제 또는 오스트리아의 여제)로서 게재하는 경향이 많다. http://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C%95%84_%ED%85%8C%EB%A0%88%EC%A7%80%EC%95%84

 

 

건물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한 내부장식이 보였다. 입구에서 안내도를 받아들고 계단을 오르자 뭔가 어수선한 철골이 보였다. 순간 '여기도 공사중이냐...'라는 한숨이 나왔다.(공사중 아니었음)

 

미술사 박물관 http://www.khm.at/en/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돔아래의 카페가 보였다. 

 

 

 

윗층에서 본 모습

 

 

 

 

 

 

 

 

 

사실 미술관에 갈 때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정도는 공부하고 가는 게 맞는데, 이 때는 정말 생각없이 막 갔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서도 그다지 큰 느낌이 없었다. 그게 좀 아쉽다.;;

 

전시관 안에서 사진 찍는 건 허락되기 때문에(플래시 안됨) 마음에 드는 몇몇 그림을 담아보았다.

 

 

orazio,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옛날부터 기독교에서 특별히 공경받아 왔지만, 특히 로마 가톨릭 지역에서는 특유의 많은 전설들로 색칠되어 있다. 무신론자와 안티기독교의 견해에 의하면 그녀는 예수의 배우자였거나 수제자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마리아 막달레나를 조상으로 숭배하던 교파와 교단이 프랑스 남부와 에스파니아 북동부에 존속하기도 하였다. 성경의 각 복음서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특정되어 있지 않은 몇몇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중의 베타니아의 마리아 등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시되어 예수의 발에 눈물을 떨어뜨려, 스스로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향유를 발랐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를 그린 성화상에서는 향유 항아리를 손에 든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자코모 다 바라라제의 《황금전설》 등에 따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매춘부 출신으로 한동안 쾌락에 탐닉하다가 예수를 만나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막달레나에게는 창녀도 의미하는 ‘죄의 여자(the Sinner)’라는 별명이 주어지고, 르네상스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의 회개를 주제로 하는 회화나 조각이 많이 제작된다.
http://ko.wikipedia.org/wiki/%EB%A7%88%EB%A6%AC%EC%95%84_%EB%A7%89%EB%8B%AC%EB%A0%88%EB%82%98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공주 그림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년 6월 - 1660년 8월 6일)는 스페인의 화가이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년 6월 6일-1660년 8월 6일)는 대개 디에고 벨라스케스로 불린다. 그는 펠리페 4세(스페인어: Felipe IV) 궁정을 주도하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다. 당대의 바로크 시대 화가였으며 초상화에 유능한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1629년에서 1631년의 1년 반동안 미술 공부와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1649년 그는 다시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스페인 왕족 중 다수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유명한 유럽 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다. 그 작품의 절정은 그의 걸작 중의 걸작인 시녀들(스페인어: Las Meninas)(1656)이다.

19세기의 초반 동안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다른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화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마네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B%94%94%EC%97%90%EA%B3%A0_%EB%B2%A8%EB%9D%BC%EC%8A%A4%EC%BC%80%EC%8A%A4

 

작가나 작품명을 모르겠다. 눈빛이 참 마음에 들었던 그림

 

 

테르니에, 갤러리의 빌헬름대공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vermeer의 The Art of Painting

 

 

 

 

 

 

 

 

 

 

사진 찍기가 뭐해서 찍지는 않았지만(구경하는 사람이 많았음), 여러가지 유명한 그림들이 무척 많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그림들을 직접 본다는 건 꽤나 기쁜 일이었다.(국내전시회는 가격도 그렇고 양도 마뜩하지를 않다;;)

 

 

 

 

2층으로 올라가자 대형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잠시 둘러보고 금방 내려왔다;;

 

이 외에도 술과 관련된 전시장이 있었고,  이집트같은 고대문명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곳도 있었다.

대영박물관 때도 그랬지만, 정말 이집트유물들... 유럽에서 다 들고 왔다. 제자리에 있는 게 있기나 할른지. 에휴.

 

 

내려오다보니 공사중이었던 것처럼 보이던 곳이 실제로는 클림트 그림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난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클림트의 그림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국내전시회 할 때 전시회장까지는 가 봤음;;;) 크기나 화려함에 정말 놀랐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강렬함이랄까.

좀 가까이에서 찍고 싶었으나... 난간위에서는 사진 촬영 금지라서 내려와서 망원으로 찍을 수 밖에 없었다. ㅡㅠ)


(클림트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 글에 자세히 쓰려고 한다)

 

 

 

 

미술사 박물관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다 둘러보지도 못하고 박물관상점에서 구경을 좀 하자 어느샌가 폐관시간이 되어버렸다.

아쉬움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올 밖에.

 

밖으로 나오니 아직 밖은 환했다. 제대로 된 지도도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정 눈에 보이는 곳 여기저기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금방 호프브루크 궁전이 나타났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냥 궁전의 정원을 따라 걸었다. 저녁무렵이었지만 햇볕이 꽤나 따가웠다.

 

 

 

뭔지 모를 멋진 건물... 나중에 알고 보니 국회의사당.

 

 

 

지하철 역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며 걷다보니 높은 첨탑이 보였다. 슈테판 성당이 아닐까~싶어 무턱대고 가까이 가니 많은 가판이 모인 곳이 나타났다.

 

 

 

 

 

필름페스티벌에 대해 알고는 있었기에 '아, 여기가 거기구나'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딘데? 다음날에야 성당처럼 근사하게 보였던 건물이 실은 시청청사였다는 걸 알았다.;;

필름상영을 볼까~하고 앉아서 기다리려했지만,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http://www.wien.gv.at/english/culture-history/film-festival.html

 

 

 

 

터벅터벅 걸어서 찾아간 슈테판 성당으로 보이는 건물은 주변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마치 공사중인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 번화가라고 하지 않았나? 벌써 다들 사라진건가? 

... 음... 슈테판 성당 아닌 건... 나중에 알았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큰 도시에서 잠시 헤매는 건 작은 도시에서 헤매는 것과는 다른 중압감으로 다가와서 포기하고 해도 지기전에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어딜갈까 망설이다가 그래도 궁은 하나 봐야지 싶어 쉔부른 궁으로 갔다.

서역(왜 기차역 주변은 지저분한걸까??)에서 트램을 타고 찾아간 쉔부른은 베르사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만큼 땡볕 아래에 있었다. 

그나마 좀 일찍가서 줄을 오래 서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다.

 

 


표를 사는데 어떤 표를 살까 고민하다가 즉흥적으로 클래식패스를 사고 말았다.... 그냥 가기에는 뭔가 아쉬울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클래식패스: Classic Pass Grand Tour + Maze + Crown Prince Garden + Gloriette



왜 그랬을까? OTL 


http://www.schoenbrunn.at/en/

 

무려 한국어로 된 음성가이드를 들고 궁전 안을 둘러보며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다. (음성가이드는 삼성이 손을 써서 비치가 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모르겠다)

원래 별장이었던 곳이어서인지 생각보다는 작은 편이어서 방 갯수에 비하면 그리 오래 구경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사람이 차고 넘쳤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만나면 옴쭉달쑥도 못하는 상황)


휘리릭 둘러본 후 궁궐 밖으로 나와 정원쪽으로 향했다. (정원쪽 출구는 매표소 안쪽 건물에 있다-여길 못찾아서 무지 헤매는 일본인 노부인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큰 나무들과 땡볕이 반갑게(;;) 맞이하여주었다. 



 


궁전 다음으로 찾아간 황태자의 정원은 그다지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무터널을 지나는 것이 꽤 운치있었다. 연인과 함께 온 사람들이라면 손잡고 걷기 딱일 듯.

 

 

 

 

 

 

 

 



황태자의 정원에서 나와 분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른 길로 가기는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라 그늘로만 걷느라 꽤 돌아서 갔다.

 

 

 

 


청설모에게 먹이를 주던 아저씨. 


 


 

 

 


 


 

 

 

 


 

 

 

 


드디어 분수에 도착. 고개를 돌리니 글로리에트가 보인다. 클래식패스니까... 올라가야한다는 중압감이 갑자기 엄습했다. 아, 내가 왜 이 날씨에 클래식패스를 샀던가. 



 


올라가려고 주위를 둘러보다보니 미로공원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방향치 주제에 미로공원은 무리였을까? 길 잘못들어 꽤 오래 헤매고 있으니 덥고 힘들고....


미로공원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도 있었는데, 작동 가능한 놀이기구들이 참 참신해보였다.













글로리에트로 가는 빠른 길보다 동물원쪽의 그늘길을 골라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생각보다... 멀었다.



 

 

 


티켓을 찍고 올라간 글로리에트의 옥상은 시야가 트여 보기는 좋았지만 오래 앉아서 감상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그냥 사진찍고 내려오는 정도랄까.

그래서 아랫쪽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보여서 거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 역시 더웠다.




때는 어느 새 점심무렵이었다. 자, 이제 슈니첼 먹으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