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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뽈뽈/동유럽 2012

[체코]프라하-성비투스 성당(bgm)

라온그리메 2012. 8. 12. 22:43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D3Lom







읽는 분들께:

아래의 설명들은 다 기억력에 의존하여 쓰여지는 것들로 100%정확한 것은 아니니 참고하여주세요.(인용부분 제외)

 

 

성비투스 성당은 두 부분으로 분리되어있다. 하나는 그냥 볼 수 있는 곳이고 하나는 입장료를 내야 볼 수 있는 안쪽. 유명한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당연히 안쪽에 위치.

 

성 비투스 대성당 (Katedrála svatého Víta)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대주교좌로 프라하 성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딕 양식의 뛰어난 전범으로 꼽히는, 체코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성당이다. 1989년에 성 비투스, 성 바츨라프, 성 보이톄흐 대성당 (Katedrála svatého Víta, Václava a Vojtěcha)으로 개명하였다. 이 대성당에는 여러 명의 체코 왕과 여러 성자들, 영주, 귀족, 대주교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1_%EB%B9%84%ED%88%AC%EC%8A%A4_%EB%8C%80%EC%84%B1%EB%8B%B9

 

성당의 구조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양쪽 의자들은 신자들이 앉는 신자석입니다. 신자석 앞쪽에는 연단이 있고 단상에는 큰 탁자 같은 게 있습니다. 이 큰 탁자를 제대(祭臺)라고 부르며, 제대가 있는 연단 전체를 제단(祭壇)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성당에 가든지 이 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당의 중심이 바로 제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미사)가 이뤄지는 곳이자 또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과 음식을 나눈 그 식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대는 성당의 중심입니다. 성당 건물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제대가 없으면 성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제대를 향해 합당한 공경의 예를 표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대부분 성당에서 십자가는 제대 뒷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제대 옆 또는 공중에 십자가를 배치하기도 합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신자 공동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제대 뒷벽 오른쪽에 빨간 등이 켜져 있고 그 등 옆 또는 바로 아래에는 함이 있습니다. 이를 각각 성체등과 감실이라고 합니다. 감실은 미사 때 축성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모시는 '성체'(聖體)를 보존하는 함입니다. 성체등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감실에 성체가 모셔져 있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어떤 성당에는 제단에 감실이 있지 않고 별도 공간에 감실을 마련해 성체를 모셔두기도 합니다.

  제단에는 또 사제가 앉는 사제석이 제대 뒤 벽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 왼쪽에는 보통 성경봉독대가 있습니다. 성경 봉독대(독서대)는 미사 때에 신자들이 독서를 봉독하거나 사제가 복음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제대 오른쪽에는 해설대가 있는데, 해설대는 제단 아래에 둡니다. 미사 전례에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 진행이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보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자석쪽 성당 옆 벽면 좌우에는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도록 안내하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모셔져 있습니다. 또 성당 뒷쪽이나 문 입구 부근에는 '고해소'라는 팻말이 붙은 칸막이 공간이 있는데,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보는 곳입니다. 문 옆에는 축성한 물 곧 성수(聖水)를 담아두는 성수대가 있습니다.

http://myilwon.com/bbs/board.php?bo_table=z4_a&wr_id=7&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퍼오기는 했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음;;; 몇군데만 아, 거기가 거긴가? 할 뿐. ;;; 맨날 관광지에서 잠깐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나오는 곳이 성당인지라..쿨럭.

 

워낙 많은 성당을 본 탓인지 그다지 규모 등에서 많은 감명을 받지는 않았다. 색다른 것이라면 19세기말쯤 지어진 것들이 많아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내용이 굉장히 현대적인 것이라는 거? (라고 해도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짱임. 게다가 바르셀로나에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름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도 있는데 뭐.;;;)어떤 스테인드글라스는 보험사의 약관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보험사가 돈을 많이 냈다나;;;)

 

성당의 중앙에 있는 무덤은 이교도라서 땅에 묻힐 수 없었던 초기왕후(이름 잊어버림..쿨럭)와 그를 너무 사랑했던 왕, 그리고 그의 아들(늙어죽었는데 부모 옆에 묻혔다고 함)의 무덤이다.

 

 

 

 

 

체코의 성인들을 나타낸 부조.

밑의 작은 그림은 죽은 경위(?). 설명 다 들었는데 다 까먹었어.커헉... 이런 기억력이라니.

기억나는 건 두번째 인물(이름은 잊었으나)이 동생하고 사이가 무척 안좋아서 결국 동생에게 등을 창으로 찔리고 죽었다는 거. (문을 열려고 하다가 문고리만 잡고 죽었다고 함)

되게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누구였지? 음... 언젠간 기억이 나려나?

웃기는 건 자기가 죽여놓고서는 나중에 로마 쫓아가서 성인으로 추대받아가지고 왔다는 거. 정치라는 건 참...

 

 

 

 

 

파이프오르간.

이 성당은 다른 성당들처럼 실제로 미사를 드리기도 한다는데,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고, 이 동네 교적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고 했다. 사실 성당의 백미는 모든 불이 다 켜진 미사시간인데.(산티아고에서 본 기억으론 불이 켜진 거랑 안켜진 거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이었기 때문에;;;)

 

 

기도처의 장식. 좀 유치해보이기도 한다. 근데 마음에 들었음. ㅋ

 

 

 

마음에 쏙 들었던 조각상.

 

 

 

 

 

암염이 나는 광산을 상징하였다고 하는 기도처. 무늬가 색달랐다.

 

바촐라프의 할머니인 성녀.... 며느리한테 독살당했다고.

비엔나의 씨씨(엘리자베스 황후)를 보면서도 느낀 건데, 동상이나 초상화는 미화되는 경향이 굉장히 심하다. 무슨 할머니 얼굴이 저리 팽팽하누. ;;;

 

 

 

 

그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이건 유명한 장미의 창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사진으로 잘 찍으려면 흐린날 찍어야 한다고...

 

 

 

이게 보험약관이던가?

 

 

 

 

기본적으로 스테인드 글라스는 납으로 판을 짜고 거기에 색유리를 끼우는 식으로 제작되었는데, 납을 깔끔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옛날 도공들은 직접 손으로 납을 만졌다고 한다.

당연히 납중독이 되어서 다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그당시에는 이런 현상을 '성스러운 그림에 기를 다하였기 때문'이라고-쉬운 말로 기(氣) 빨렸다- 말했다고 한다.쿨럭.

사진을 확대해서 보려면 볼수도 있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 그러나 아쉬우므로 확대 사진 몇 개 더 올려본다.

 

 

 

 

 

 

장미의 창의 경우 정말 무늬가 정교했다.(카메라 바꿔써 찍을 걸... 이렇게 해상도 차이가 날 줄이야;;;)

 

 

 

짜자자잔!! 드디어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

 

알폰스 마리아 무하(체코어: Alfons (Maria) Mucha [[:Media:|듣기]] (도움말·[[:Image:|정보]]), 1860년 7월 24일 - 1939년 7월 14일)는 체코의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이다.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무하는 모라비아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79년 빈으로 옮겨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미쿨로프의 카를 쿠헨 백작이 흐루쇼바니 엠마호프 성과 벽화를 부탁한 뒤에 그의 그림에 감명받아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1887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Académie Julian과 Academie Colarossi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Theatre de la Renaissance에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포스터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게되어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전형적인 회화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클라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있었다.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즈비로그 성의 거대하고 크리스탈로 된 큰 방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그의 붓 아래에서 20개의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왔다. 슬라브 민족 역사에 있어서 변혁의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특히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느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또한 곧 준공될 성 비투스 대성당의 메인 유리를 스케치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등을 디자인했다. 1908년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프라하에 이를 헌정했다. 당시의 프라하에서는 모든 <슬라브 서사시> 작품 전체를 전시할 만한 갤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전쟁후에 일시적으로 모라비아 성에 일시적으로 출품하였다. 체코어로는 Moravsky krumlov로 1963년부터 관람이 가능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번째 우표는 무하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하의 애국심은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독일의 적으로 간주한 명부에 포함할 만큼 유명했다.198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서거하였다. 알폰스 무하는 비셰그라드의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무하의 작품세계는 프라하 박물관에 헌정되었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모라비아 크루믈에서 전시되었다. 또한 무하 삶의 초기 시대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던 <ИВАНЧИЦ>법원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세계의 많은 주요한 박물관과 화랑들에는 무하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예전의 박람회 단지에서 멀지않은 프라하의<СТРМОВК>공원에 <슬라브 서사시>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물의 건축 설계가 진행중이다. 소행성 5122는 무하의 명성을 기려서 명명한 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D%8F%B0%EC%8A%A4_%EB%AC%B4%ED%95%98

아놔... 프라하박물관 가볼 걸...OTL

 

 

 

 

 

 

 

 

 

좋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림의 내용은 보헤미아의 성자들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던 일반적인 스테인드글라스의 제작방식과 무하의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유리가 색깔별로 조각조각 나있지 않다는 점. 이것을 위해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수채물감-유채물감은 불투명하니까-을 이용하였다는데, 원하는 색깔이 나올 때까지 수채물감으로 덧칠을 하였다나... 커헉... 저 색을, 저 크기를 수채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입구의 이 그림에 넋을 놓고 마냥 있을 수는 없는 게 아쉬울 뿐.

 

 

 

 

 

 

프라하의 옛모습. 거의 바뀐 것이 없다고 한다. 대규모 전쟁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비투스 성당을 구경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구경은 시작쪽일 뿐.